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공군 === 제일 빨리 지원이 이뤄진 곳은 공군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당장 전투기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고 더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미국은 주일 미 공군에 있는 전투기를 지원한다. 이때 지원받은 게 F-51 머스탱이다. 2차대전 당시 '하늘의 황제'로도 불렸던 머스탱이었지만, 당시 이미 프로펠러 전투기들이 퇴역하고 제트 전투기가 대세가 되던 시대였는데, 그럼에도 이러한 전투기를 준 건 당장 제공할 전투기가 마땅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일 미 공군이 보유하던 전투기는 당시 미국의 최신 제트 전투기인 [[F-80 슈팅스타]] 380대와 [[F-82]] 트윈 머스탱 32대, [[A-26]] 인베이더 지상공격기 29대, [[B-29]] 폭격기 30대 정도였다. 하지만 이중에서는 지원될만한 항공기가 없었다. F-80 슈팅스타는 당시 미국의 최신 제트 전투기여서 미국으로서는 넘겨주기가 껄끄러웠고, 설사 넘겨줬다 하더라도 그 당시 한국 공군의 역량상 슈팅스타를 다루는건 불가능했다. 한국 조종사들 중 당장 장기간 훈련을 받지 않고도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었던 건 고작 10명 정도였다. 게다가 슈팅스타는 제트기인만큼 프롭 전투기들보다 유지 보수하는데에 인력과 시간,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서 정비병조차 제대로 된 인력이 없던 당시 한국 공군이 다루기는 무리였다. 한국 공군이 익숙한 건 일본 전투기였는데 이 비행기들은 우월한 기동성을 바탕으로 [[도그 파이트|격투전]]을 벌이는데에 특화되어있었다. 반면 미국제 전투기는 기체가 무겁더라도 빠른 속도와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한번 공격할 때 확실하게 공격하도록 만들어졌다. 이러한 차이점으로 상승 속도나 안전 고도 확보, 우회같은 점에서 큰 차이가 나며 그 차이는 단기간의 훈련으로는 익숙해지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미국제 항공기 가운데 국군이 다뤄본건 L-4, [[L-5]]연락기와 T-6 텍산 연습기가 전부였는데, L-4, L-5 연락기는 제대로 된 철제 항공기가 아닌지라 논외로 치고 T-6 텍산 연습기가 그나마 익숙해질 수 있었던 기체였지만 당장 텍산 연습기를 건국기로 부르던 당시 상황에 텍산 연습기를 타고 [[월북]]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종사 10명한테 맡겼기 때문에 항공기 지원은 10대밖에 못 받았다. 숙련도 부족으로 F-80 슈팅스타는 다룰 수 없어서 제외. F-82G 트윈 머스탱은 장거리 호위전투기로 장거리 비행은 가능했지만 당장 한국군에게 필요한 지상지원이 불가능했다. 지상지원이 불가능한건 아니었지만 이 전투기 자체가 지상공격을 하도록 만들어진 전폭기가 아닌데다가 머스탱 2대가 묶인 전투기인지라 조종사가 두 명은 필요했다. 10명이 2명으로 나뉘어 5대 밖에 지원 받지못하니 기체 대수가 줄어 문제가 됐던 것. 물론 열 대의 전투기로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건 불가능이지만 어찌되었건 당시에는 기체 대수까지 고려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A-26]] 인베이더 지상공격기는 지상공격기로 특화되어있지만 전투기가 아니다. 지상지원이 필요하다고는 하나 적 공군이 아직 건재했고 공중전도 감안해야된다는 조건도 겹쳐 제외. 또한 [[A-26]]을 조종하려면 숙련된 조종사가 2~3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인력 문제도 섞여있었다. [[B-29]]는 폭격기인지라 위와 같은 이유로 일찌감치 제외. 미 해병대같은 경우라면 [[F4U 콜세어]]나 [[A-1 스카이레이더]] 같은 항공기도 고려해볼 수 있지만 당시 일본에는 없었다. 결국 어떤 전투기를 제공할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선정된게 [[F-51]] 머스탱이다. 당시 미국은 2차 대전이 종료되고 2차 대전 당시 주력전투기 대부분을 퇴역시켰다. 제트 전투기를 다수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포함한 기존에 퇴역시킨 프로펠러 전투기들의 유지비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필요한 수량은 해병대에서 운용하고 예비역으로 보관했고 나머지는 고철처리하거나 신생국에 헐값으로 팔았다. 일본에 보관된 F-51 머스탱은 [[F-80]] 슈팅스타의 조종이 익숙하지 않아 일단 보관하고 있었던 거고 나중에는 표적연습으로 삼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전폭기라는 조건상 지상과 공중전에 활용가능하고 항속거리는 일본에서 한국까지 오는 것도 문제없고 선회속도도 괜찮으며 무장 또한 로켓부터 500파운드 폭탄, 6정의 기관총으로 강력한 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시험비행과 맥아더의 전쟁 시찰시 호위기로 뽑혀 북한군 야크 전투기를 격추시킨 전적도 있다. 하지만 장시간 훈련 자체가 불가능한 전선 상황에 일본의 기후가 좋지 않은 조건이라 6월 26일부터 7월 1일까지 훈련도 못받고 정신 교육만 실컷받고 7월 2일에야 날씨가 개서 이착륙 훈련을 했는데, 총 비행 시간이 평균 30분이었다(...). 전선이 불리해지자 결국 머스탱들이 대구 비행장에 착륙, 미군사고문단 [[딘 헤스]] [[소령]]이 이끄는 군사고문단과 함께 바우트원 대대, 통칭 한판승부라고 불리는 부대를 창설했다. 훈련시간이 워낙 짧은 탓에 일본에서 한국까지 직접 비행해왔다고 한다. 첫 전투에서는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4대 2개 편대로 나누어 적군을 공격했고 전차 2대와 차량 몇대 유류 보관소 1개소 탄약 보관고 1개소를 파괴했다. 훈련이 부족해 폭탄이나 로켓을 사용하지 못하고 기관총 6정이 전부인 당시 상황에는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번째 출동에서는 당시 한국 공군 최고 에이스였던 이근석 대령의 기체가 추락하면서 이근석 대령과 머스탱 1대를 잃었다(격추당한건지 아니면 표적고착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상황은 당시 한국 공군을 절망에 빠트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투기도 전투기지만 최고 에이스였던 이근석 대령은 한국 조종사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었는데 그런 그가 허무하게 죽었으니 그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딘 헤스 소령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고, 한국 공군은 딘 헤스 소령이 이끄는 군사고문단의 지시로 훈련을 받는다. 출격 명령이 내려지면 딘 헤스 소령과 미군이 대신 나가거나 같이 출격하여 시간을 벌어주었다. 하지만 머스탱 두 대가 더 추락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에게 준 머스탱을 회수해 미 공군에 편입시키자는 의견이 미국에서 나왔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딘 헤스 소령이 상부를 설득하여 비행대가 해체되는건 막았다. 바우트원 대대는 전장의 상황에 따라 사천, 진해, 여의도, 제주도 등 여러 비행장을 옮기고 추가로 머스탱을 지원받아 훈련과 전투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을 비롯한 작전들을 수행해 한국공군의 단독작전권도 되찾았다. 총 8495회 출격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100회 이상을 출격하는 조종사도 나왔으며 확인된 전과만 적 899명 사살, 건물 1770동, 차량 459대, 탄약 및 연료집적소 1285개소, 철교 및 인도교 124개소, 포진지 521개소, 철도 1014개소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평양 대공습에 참전하고 유엔군이 실패한 승호리 철교 폭파를 성공시켜 한국 공군을 과소평가했던 미군이나 다른 나라들이 인정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추가적인 머스탱 공급이 필요했지만 주일 미 공군이 가진 머스탱은 극소수였고 결국 미국 본토에서 주방위군용으로 운용하던 프로펠러 전투기를 찾아냈는데 미국 서부에서 운영하던 머스탱이 미국 동부에서 운영하던 [[P-47 썬더볼트]]보다 당장 한국에 지급하기에 좀 더 가까워서 [[P-51 머스탱]]이 추가 지원된 것이다. 전쟁기간에 지원받은 항공기 133대 중 80대는 머스탱이었고, 그 밖에 [[C-47]] 수송기 1대와 각종 연락기, 연습기를 제공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